빛바랜 접경에서 에필로그 - 접경, 그 너머 [完]


그날, 나는.

한 명을 살렸다.

그리고 한 명을 죽였다.

결국, 내가 있는 한 이야기의 결말은 비극이었다.


접경, 그 너머

 “이걸 다 가져가게요?”

 “아니중요한 자료만 빼고 다 파기할 거야.”

 작업복을 입은 건장한 사내들이 내 집과 도로에 주차한 트럭 네 대를 분주히 오갔다미스트가 고용한 짐꾼들이 옮기는 물건들은 서재에 보관해둔 부모님의 연구 자료였다.

 ‘거래를 하고 싶어요.’

 이른 새벽나는 미스트의 집에 불쑥 찾아가 그리 말했다나와 더는 얽히기 싫다는 의사를 밝힌 그녀였지만모두를 잃은 내가 기댈 사람은 그녀가 유일했다.

 ‘우리 가문의 연구 기록을 다 드릴게요대신 절 거둬주세요.’

 두 번의 경험으로 뼈저리게 느꼈다이렇게 약아빠져서는 스스로조차 제대로 지키지 못한다앞으로 다가올지도 모를 난관을 헤쳐나가려면 힘을 길러야 한다그러기 위해서는 준비할 여유가 필요했다.

 나는 탄생의 법칙에 관한 자료를 그녀에게 남김없이 보여주었다그 외에도 서재에는 그녀의 이목을 끌 만큼 질 좋은 자료가 수두룩했다.

 거래는 성공적이었다미스트는 아침이 밝자마자 고용인들을 데리고 내 집을 방문했다그녀는 오늘부로 한국을 뜰 예정이니 지금 짐을 전부 옮겨야 한다고 했다.

 “한국에서 볼일은 끝난 거예요?”

 “애초에 이렇게 오래 머물 생각도 없었어자꾸 일이 생겨서 좀 길어지긴 했는데.”

 자신의 고향인 독일로 돌아가 그동안 한국에서 진행한 조사들을 정리할 계획이다그곳에는 연구에 필요한 전문 장비가 잘 갖춰져 있고일을 도와줄 지인도 많다고그녀가 설명했다.

 “너도 재단에 너무 많이 노출됐으니까 몸도 숨길 겸가볍게 여행 간다고 생각해.”

 나는 안전을 보장받는 것만으로 족했다거기에 같이 지내면서 다방면의 마법을 가르쳐주겠다는 미스트의 제안은 덤으로나도 내 나름대로 실체화 마법을 연구해나갈 것이다.

 “신분 세탁해서 재단’ 수습생으로 들어가는 건 어때그래도 거기가 기초는 기가 막히게 가르치는데.”

 “됐어요그럴 바에 그냥 죽을래요…준이는 아직 연락 없어요?”

 이준그 일이 있고 나서그는 우리 앞에서 사라졌다학교는 당연히 오지 않았고 그의 집에도 없었다전화 역시 꺼진 상태로완전히 종적을 감췄다.

 미스트가 말했다.

 “오늘 우편함에 이게 있었어.”

 그녀가 보여준 것은 흰 편지 봉투였다.

 받는 이은세연 귀하.

 보내는 이이준.

 편지지에는 악필로 짧은 메시지가 쓰여 있었다.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때가 되면 다시 만나러 갈게.

 잘 지내.

 “준이도 생각이 있겠지.”

 “.”

 그가 어떤 사람인지 조금이라도 안다면왜 그랬는지는 그리 어렵지 않게 짐작이 갔다.

 다만 떠나는 것이그것이 최선이었을까.

 “…그렇겠죠.”

 그 답은 나도 알지 못하고별 의미도 없었다그는 벌써 떠났다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분명 고심 끝에 내렸을 그의 선택을 존중해주는 것그리고 그가 온 힘을 다해 살려준 나 자신을 지키는 것이었다.

 “짐 다 옮겼습니다바로 출발할까요?”

 인부 한 명이 우리에게 찾아와 말했다.

 “바로 공항으로 가주세요세연아출발하자.”

 “.”

 편지지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접어서 지갑 안쪽에 보관했다.

 때가 되면 다시 만나러 갈게.

 몇 년이 지나든그는 약속을 반드시 지키리라.

 내가 아는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미스트의 차에 올라타 가방에서 펜과 수첩을 꺼냈다다시 만났을 때잊지 않고 꼭 답장할 수 있도록전하고 싶은 마음을 있는 그대로 수첩에 글로 담아냈다.

END




See Translation

Profile Image Yu

Last updated:

URL
Ads have been block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