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바랜 접경에서 7화 - 접경에서
접경에서
두 하늘이 있었다.
한쪽은 푸른 초원이 지평선 뒤로 끝없이 펼쳐졌다. 새파랗고 맑은 하늘, 햇빛이 평원 아래 시원한 그늘을 내렸다. 그 옆에는 뭉게구름들이 자유롭게 상공을 누비고 있었다.
그곳은 살아 있었다.
다른 한쪽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느 것 하나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검은 하늘이. 하늘이라 부르기도 애매한 까만 공허가 있었다. 천지天地의 구분조차 지워진 그곳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곳은 죽어 있었다.
나는 공존할 리 없는 두 세계가 맞닿은 곳, 갈라진 접경에 서 있었다. 어느 쪽이든 한 발짝이면 넘어갈 수 있을 만큼 경계의 간격은 아슬아슬했다.
주위를 둘러보고 그제야 깨달았다. 매일 밤 내 잠자리를 장식하는 꿈. 또 그 꿈이었다.
나는 항상 이곳에 오면 가장 먼저 자신에게 묻는다.
난 왜 여기에 있는가.
이젠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이미 수백, 수천 번을 되물은 질문이었다. 내가 찾은 답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였다. 굳이 이유를 따지자면, 느낌이 그러했다.
그럼 두 번째 질문.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가.
시간이 지나도 아무도 이곳을 찾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꿈은 매번 여기서 막을 내렸었다. 그리고 그다음 날에도 같은 배경, 같은 위치로 꿈이 되감겼다.
이런 시답잖은 꿈에. 오늘은 변화가 불었다.
초원의 지평선 너머로 누군가가 오고 있었다. 서로가 어느 정도 가까워지자 친숙한 얼굴이 반겼다.
두 번째 답을 찾았다. 은세연. 나는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 세 번째 질문이다.
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는가.
나는 세연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그녀는 평소의 모습과 다른 점이 많았다.
일단, 왼쪽 팔이 없었다. 어디에 두고 왔는지. 그녀의 왼편이 텅 비어 쓸쓸해 보였다. 옷은 상하의를 막론하고 피투성이였다. 오른쪽 다리를 다쳤는지 자꾸만 절뚝였다. 얼굴은 줄기가 잘려나간 꽃처럼 시들었다. 검은 눈은 힘이 풀려 막 깨어난 것 같았다. 시선은 이쪽을 향하고 있지만, 날 보는 것은 아니었다. 무언가에 홀린, 그런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어느새 내 앞까지 근접했다.
터벅. 터벅. 하지만 그녀는 그대로 내 옆을 지나쳤다.
그것으로 분명해졌다. 마치 언젠가 누구에게 들은 적이 있는 것처럼 머릿속이 점점 채워졌다.
이곳은 삶과 죽음의 경계. 만물이 맞이하는 찰나의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죽어가고 있었다. 정확히는 직전. 임종臨終이 임박했다.
더 내버려두면 정말로 끝이었다.
그녀를 붙잡고 싶었다.
붙잡아야만 했다.
그러나 다리가 움직이질 않았다. 요지부동이었다. 몸이 굳은 석상처럼 딱딱했다.
나는 여태껏 아무도 지키지 못했다. 지금처럼. 지켜보는 것이 전부였다.
그녀가 첫 번째였다.
나와 비슷한 운명의 굴레 속에 빠진 사람.
그러나 나와 달리 운명에 맞서 나아간 사람.
스스로 단념한 내게 한 줄기 빛을 보여준 사람.
그래서 더욱. 그녀가 허무하게 죽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를 구하고 싶었다.
막아야만 했다.
그녀를 막게 해달라고.
나는 빛바랜 접경에서. 소리 없이 울부짖었다.
‘!’
꿈에서 깨어난 듯, 모든 것이 생생해졌다. 손발이 차례로. 몸이 움직였다. 더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나는 재빨리 달려가 팔을 뻗었다.
그녀에게.
□
“이게 무슨…!”
문제가 생겼다.
설령 바깥에 핵폭발이 터져도 끄떡없을 이 공간이. 공간 전체가 무너지고 있었다. 모든 건물이 붕괴하고, 땅은 지진이 일어나 사방으로 갈라졌다. 검은 하늘은 눈이 그치고 먹구름이 양쪽으로 찢어졌다.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거센 바람이 몰아쳤다.
존재할 리 없는 천재지변을 맞이하고서 무언가 수틀렸음을 직감했다.
“!”
네가 어떻게.
그 말을 던지려다가 공간을 흔드는 거센 진동에 주춤했다. 제 균형을 잡기도 힘든 극심한 요동 속에도 그는, 이준은 이상하리만치 꿈쩍도 하지 않았다.
“묶어라!”
내 말에 수십 개의 붉은 밧줄이 바닥에서 솟구쳐 나와 그의 팔다리를 붙잡았다.
붙잡기만 했을 뿐.
밧줄들은 그의 몸에 닿자마자 불에 타들어 가듯 붉은 가루로 소멸해 공중으로 사라졌다.
한 발짝, 물러났다. 예상치 못한 결과에 난처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준이 움직였다.
이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분부에 따라 처형하라!”
명령이 하달되자 허공에 수십 개의 새빨간 포신들이 빽빽이 정렬했다. 아직 남은 공간의 에너지까지 한데 집중한 가장 최대 전개.
일제히 그를 조준했다.
그리고 단숨에,
“뭐―”
소멸했다. 하나도 남김없이. 모든 것이 붉은 재가 되었다.
생각이 초점을 잃었다. 혼란스러웠다. 어떻게 된 일인가. 지금 벌어진 상황에는 과정이 하나도 없었다. 이준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그저 걸어오고만 있었다.
게다가 내가 아는 그는 이런 대형 마법을 구사하는 대마법사도, 신도 아니었다.
설마.
다시금 한 발짝 더 뒤로.
어쩌면 애당초 나는 보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가 나보다 먼저 올라선 것이다. 한 단계 더 위로. 내가 그토록 염원했던, 세계의 위쪽으로.
이미 그는 나와 다른 곳에서 세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더는 물러나지 못했다. 힘없이 벼랑 끝에 내려앉았다. 뒤편은 길이 무너져 끝없는 공허의 절벽이 되었다.
천천히. 그가 내게 손을 내민다.
소름이 끼쳤다. 온 피부를 감싼 오한은 단순히 기분 탓이 아니었다. 마주한 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그러나 피할 수 없었다. 그런 생각이 든 순간, 그의 손길이 내게 닿은 뒤였다.
내가 마지막으로 마주한 그는.
죽음 그 자체였다.
◇
귀를 기울였다. 희미한 바람 소리가 귓등에 차갑게 비볐다. 소리는 갈수록 더 선명해졌다. 감은 두 눈을 살며시 들췄다. 깊은 잠을 막 마친 것처럼 개운했다.
주위가 온통 새하얬다. 눈송이가 떨어져 눈가를 촉촉하게 적셨다. 그 덕에 잠기운이 살짝 달아났다. 하늘은 아직 한밤중이었고, 나는 여전히 운동장 한복판에 있었다.
그를 불렀다.
“…준아?”
이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무릎을 꿇은 채 내 곁에 앉아 있었다. 나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볼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 위로 물줄기가 기다랗게 흘러내렸다.
그와 시선을 맞댔다. 그의 검은 눈동자는 눈물로 가득 젖었다.
“왜 울고 있어….”
그는 고개를 연신 저으며 멈추지 않는 눈물을 한없이 쏟아내고, 또 쏟아냈다.
무엇이 그토록 그를 슬프게 했는가. 무엇이 그가 비탄에 잠길 정도로 아프게 하였는가.
“…왜 그러냐니까.”
그는 끝내 침묵했다. 나도 더 묻지 않았다. 대신 그를 잠자코 끌어안고서 등을 살포시 두드려주었다.
토닥토닥, 엄마가 아기를 재우듯. 그에게서 흘러내리는 구슬비가 그만 그쳤으면 하는 바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