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바랜 접경에서 2화 - 빗나간 기습

빗나간 기습

 더 쉬다 가도 된다는 미스트의 권유를 사양하고 집으로 돌아왔다고작 사흘 비웠을 뿐인데도 현관 로비에 먼지가 자욱했다일단 청소는 나중에먼저 할 일이 있어 곧장 아버지의 서재로 들어갔다.

 문을 열자 입구에서 방 끝까지 양옆으로 길게 줄지은 책장들이 날 반겼다책장에는 일반 서적을 비롯해 수천 년 전 고대 서적이쪽 세계에서 이름을 날린 마법사들의 저서조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우리 가문의 자료까지다양한 책으로 빼곡했다어릴 때 이곳에 살다시피 죽치고는 온종일 글자 속을 누볐었다그러다가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마법에 관한 관심이 점점 줄면서 자연히 오는 횟수가 뜸해졌다.

 오늘은 이곳에서 준비해야 할 것이 있었다.

 ‘누군가 널 죽이려 했다.’

 미스트는 그리 단언했다내가 당한 사고는 일반적인 양상이 아니었다다이너마이트 폭발 현장에나 휩쓸려야 그만큼 다칠 거라고,그녀는 그리 비유했다.

 “무슨 일이 있는지는 굳이 안 물을게또 죽기 싫으면 조심하고 다녀.”

 혹시나 그녀가 물었더라도 나는 대답하지 못한다나도 내가 뭔 일에 휘말렸는지 모르니까.

 만약 그녀 말대로 누군가 날 죽이려 한 것이라면이후의 일은 두 가지로 나뉜다.

 이대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흘러가거나.

 아니면 상대방이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다시 찾아오거나.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최악의 사태를 가정해 대비하는 것이다.

 책들의 제목을 천천히 살피며 쓸 만한 책 몇 권을 골라냈다여기 있는 책들은 한 번쯤 다 읽어봤지만마법을 다루는 것이기에 확실하게 해두는 편이 좋았다.

 마법은 일정한 공식에 따라 조건에 맞는 연료를 이용해 발현한다연료는 세상에 존재하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나뭇잎모래잡동사니아직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인간이 지닌 정체불명의 에너지까지모든 것이 통용된다어디까지나 공식에 정확해야 한다애매해서도 안 된다조금이라도 어긋나면 마법이 불발하거나 큰 부작용이 뒤따른다.

 책을 복습하면서문득 마법은 수학과 닮은 점이 많다고 생각했다.

 웅-

 마지막 책을 거의 다 읽어갈 즈음에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기상 알람이었다집에 도착한 때가 네 시쯤창밖이 여전히 깜깜해 이만큼 시간이 지난 줄도 몰랐다.

 이미 이틀이나 본의 아니게 학교를 결석했는데이참에 하루만 더 쉴까당장 필요한 준비는 모두 끝마쳤다다만 몸은 완전히 나았다고는 보장할 수 없었다.

 고민 끝에 오전 수업만 건너뛰고 점심 즈음에 느긋하게 가기로 했다.

 굳이 늦게라도 가는 이유는 이준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가 내게 말한 약속을 지킨다면 오늘 학교에서 만날 수 있으리라그날나를 목격한 그라면 그 당시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잘 알 것이고혹시나 사건에 관한 단서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덤으로 고맙다는 인사도하고 싶었다.

 4교시가 한창인 학교는 수업을 진행하는 선생님들의 목소리 빼고는 조용했다. 2학기 기말고사를 앞두다 보니 사뭇 진지한 분위기가 교정에 흘렀다나는 빼먹은 사흘 치 공부를 어떻게 메울지 고민하며 교무실로 향했다.

 출입문을 열자 긴 원형 테이블에 두 남자가 앉아 있었다.

 “.”

 하얀 머리카락 아래 놀란 듯 휘둥그레진 검은 두 눈이준이었다.

 그 맞은편에 있는 흰 와이셔츠 차림의 남자네모난 갈색 뿔테 안경 속 옆으로 길게 늘어진 고동색 눈에 검은 머리카락을 깔끔하게 뒤로 넘긴 그는 저번 주말 내게 일을 맡긴 장본인이자 새로 부임한 담임선생님김재훈이다.

 이준이 말했다.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수고했어.”

 선생님의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준은 내 옆을 지나쳐갔다나는 그를 붙잡으려 했지만,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네.”

 그보다 선생님과의 대화가 먼저였다나는 이준이 있었던 자리에 그대로 앉았다선생님이 먼저 입을 열었다.

 “맡긴 일 잘해놓고 말없이 결석해서 놀랐잖니전화도 안 받고.”

 “죄송합니다그게….”

 적당히 둘러대려 했으나선생님은 이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준이한테 들었어몸살이었다면서.”

 “.”

 “이번 결석은 병결로 돌려놨어다음엔 꼭 문자라도 남겨주렴그래야 선생님도 걱정을 안 하니깐.”

 “알겠습니다감사합니다.”

 “그래.”

 선생님은 테이블에서 일어나 자기 자리로 돌아가면서 말했다.

 “교실로 돌아가면 지은이 보고 선생님한테 와달라고 해줄래?”

 “.”

 나는 고갯짓으로 인사를 드리고 교무실을 나왔다.

 마침 4교시가 끝나 종소리가 곳곳에 퍼졌다한산했던 복도는 급식실로 가는 이들로 금방 북적였다나는 그들과 반대로 교실로 들어갔다.

 “?”

 이상함을 느끼는 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준이 없어졌다.

 본인뿐만 아니라 그의 책상도 책가방 하나 없이 깨끗했다.

 설마 싶어 빠르게 창가로 붙었다교실 창문으로 운동장과 학교 정문이 훤히 보였다그리고 콘크리트 담을 넘어가려 하는 그의 모습도 바로 시야에 잡혔다.

 미친놈저걸 지금이라도 쫓아가야 하나제자리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 와중이었다.

 “세연아!”

 뒤에서 반가운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 날 크게 끌어안았다반 단짝 친구유라였다그녀는 얼굴을 내 등에 비비며 말했다.

 “어디 갔었어이틀 동안 전화도 안 받고집에도 없고.”

 “일이 좀 생겨서병원에 있었어.”

 “걱정돼서 애들이랑 여기저기 막 찾아보고 다녔단 말이야.”

 “미안괜히 고생하게 했네.”

 나를 찾아온 사람은 한 명 더 있었다.

 그녀는 나와 멀찍이 떨어진 교실 문 앞에서 나와 마주쳤다어깨에 살포시 닿은 흑단발 아래 고양이 같은 갈색 눈동자가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윤지은나는 먼저 그녀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지은너 지금 담임선생님이 와보래교무실에 계셔.”

 “뭐 때문에?”

 “몰라그냥 오라고만 했어.”

 지은은 고개를 끄덕이고 곧장 자리를 떴다.

 기분 탓일지도 모르겠지만그녀의 눈이 떨고 있는 듯했다.

 별일 아니겠지 싶어 유라와 기말고사에 관한 이야기로 넘어갔다그러다가 잠시 있었던 이준이 떠올라 다시 창가를 확인했다하지만 그는 이미 학교에서 사라진 뒤였다.

 “밖에 뭐 있어?”

 유라가 물었다.

 “하아… 가면서 설명해줄게.”

 여기서 더 고민해봐야 머리만 아플 것 같았다이렇게 된 이상 방과 후에 다시 그의 집에 가야겠다나는 그만 그에게서 관심을 끄고 유라와 매점으로 이동했다.

 매끄럽게 뻗은 긴 갈색 생머리날카로운 눈매의 까만 눈붉은 테 안경은 그녀의 이미지를 한층 더 지적으로 만들었다.

 은세연.

 나는 지금까지 세 번각기 다른 그녀의 모습을 보았다. 한 번은 우리 집에서 베이지색 코트 차림으로다른 한 번은 학교에서 회색 교복 차림으로.

 또 다른 한 번은붉게붉게새빨간 피를 뒤집어쓴 채로.

 그때를 떠올리면 다른 기억들이 파도처럼 한꺼번에 밀려와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래도 그녀는 살았다오늘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다그 덕에 안심할 수 있었다.

 “뭘 그리 싱글벙글해 있어?”

 미스트 씨가 물었다.

 “오늘 학교에서 봤어요.”

 “아직 다 안 나았을 텐데 학교도 가고배짱 좋네.”

 미스트 씨는 그리 말하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그녀의 손가락에서 은빛이 반짝였다고대 벽화에 나올 법한 은색 눈동자 모양이 끝에 걸린 쇠 목걸이였다.

 “그 애 거야네가 갖다 줘.”

 “제가요?”

 “네가 데리고 왔으니까 끝까지 책임져야지여기 집 주소.”

 틀린 말은 아니었다대꾸하지 않고 주소가 적힌 종이와 목걸이를 받았다시계를 확인했다오후 9시에 가까웠다더 늦지 않게 나갈 채비를 마치고 미스트의 집을 나섰다.

 바깥은 밤이 저녁의 석양을 흔적도 남기지 않고 집어삼켰다유일하게 살아남은 초승달만이 어둠 속에 소심하게 달빛을 비췄다밖으로 나오니 한겨울의 한기가 온몸에 들이닥쳤다나는 청재킷을 똑바로 고쳐 입고 세연의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교복에 패딩만 걸치고서 이준의 집으로 출발했다빼먹은 공부를 자습 한 번에 다 채우고 오니 벌써 한밤중이었다그때도 이 시간에 찾아갔으니 두 번째라고 크게 문제 되진 않으리라.

 그날내가 왜 그의 집에 있으면 위험했는지그것을 그는 어떻게 알고 있었는지곰곰이 퍼즐을 맞춰 보면그가 사흘 전 사건에 관해 아는 것이 분명했다.

 골목 서너 블록을 넘어 모퉁이를 돌아 번화가로.

 가는 길이 나와야 하는데.

 발을 멈췄다.

 다른 길이 나왔다.

 익숙한 길이었다.

 그럴 것이방금 내가 걸어온 길이었다.

 슈우우―

 흔한 바람 소리보다 더 날카롭고매서웠다소리는 내가 반응하기도 전에 내 등에 닿았다.

 쾅!

 강렬한 폭발 속에서 새까만 연기가 가득 피어올라 전신을 휘감았다눈앞에 미리 준비한 보호막이 깨진 유리창처럼 박살났다하마터면 내 몸이 똑같이 산산조각이 날 뻔했다.

 미스트그 사람 말이 맞았다.

 누군가 날 죽이려 한다.

 이미 물러서기에는 늦은 듯했다이만한 굉음에 사람 하나 모이지 않았다그리고 모퉁이를 돌았을 때 걸어온 곳으로 다시 돌아온 것을 생각하면가능한 답은 하나였다.

 가상의 판현실과 똑같은 배경을 한 가짜 무대나도 모르는 새에 상대가 만든 공간 속에 갇혀버렸다.

 또다시 어둠 속에서 푸른 섬광이 날아왔다.

 나는 손가락 끝에 힘을 실었다.

 폭죽이 터지듯손가락에서 붉은 스파크가 일었다스파크는 둥근 선을 그리며 순식간에 방패로 변했다나는 그대로 정면을 방패로 막았다방패와 푸른 섬광이 맞부딪혀 불꽃을 튀기며 같이 소멸했다.

 몸속 에너지를 이용해 상상을 바탕으로 원하는 물체를 만들어내는 실체화 마법내가 마법사로서 부모님에게 물려받은일종의 주특기이다.

 상대의 공격이 잠시 멈췄다.

 그 대신 그것이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쿠구구궁.

 땅이 울렸다그것은 대형 자동차와 맞먹는 거대함을 자랑했다모습은 나도 잘 아는 형체였다.

 양옆으로 징그럽게 내뻗은 여덟 개의 다리검푸른 포도 같은 수많은 눈동자가 일제히 날 노려보았다앞으로 길게 휜 커다란 송곳니 이빨 두 개는 입맛을 다시듯 툭툭 맞대고 있었다.

 푸르스름한 빛깔로 온몸을 감싼 그것은 거대한 거미였다.

 “안녕.”

 순간그 한 마디에 그녀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거대 거미 뒤에서 걸어 나왔다나는 상대와 마주치자마자 착각이 의심으로곧바로 확신으로 바뀌었다.

 가로등 불빛에 비친 수수한 검정 코트에 깔 맞춘 듯 걸맞은 새까만 단발머리평상시와 달리 노란색으로 물든 눈동자는 정말로 고양이 같아 보였다.

 “네가 왜.”

 믿기지 않았다.

 근 반년을 넘게 알고 지낸 친구가 눈앞에적이 되어 나타났다.

 지은이 말했다.

 “잘 지내줘서 고마웠어.”

 내가 물었다.

 “날 감시한 거야?”

 “그때 얌전히 죽었으면 적어도 네 기억 속에선 내가 친구로 남았을 텐데.”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말투였다이미 그녀는 내가 아는 친구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왜 날 죽이려 하는 거야?”

 마지막 질문에 지은은 애매한 답을 내놓았다.

 “네가 죽어야 할 운명이라서그 정도만 알아둬어차피 이제 죽을 건데.”

 그 말은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하지만 대화는 더 이어지지 않았다.

 그 마지막 대답을 끝으로뜻밖의 조우는 두 마법사의 목숨이 걸린 싸움으로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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